성형 권하지 않는 의사와 청계산 산행… “마음 성형이 필요한 시대”
“히말라야 14좌 같은 고봉에서 인간이 겪는 극한 상태의 경험은 과연 어떤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마치 신의 영역 같은 그런 곳에 가려면 인간 개인이 가진 힘만으로, 또는 기술만으로는 절대 올라갈 수 없을 겁니다. 정말 겸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로 생각됩니다. 아마 웬만한 종교인보다 더 뛰어난 정신세계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진세훈 성형외과 원장과 엄홍길 대장이 청계산을 오르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엄홍길 대장 같은 사람은 겸손하면서 인격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사람일 겁니다. 의사 중에서 그렇게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겸손한 사람은 딱 한 사람 봤습니다. 돌아가신 장기려 선생님이 그런 인격자였습니다. 빨리 엄 대장을 만나서 어떤 사람인지, 어떤 극한 정신세계를 경험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강남 진성형외과의 진세훈(58) 원장. 성형수술을 권하지 않는 성형외과 의사로 더 유명하다. 얼마 전 가벼운 교통사고로 얼굴을 조금 다친 한 환자가 병원을 찾았다. 턱 부위에 간단한 수술을 하면 되는 상태였지만 환자는 코와 눈 성형까지를 원했다. 진 원장이 가만히 보니 전혀 성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눈과 코를 성형하면 자연스런 얼굴을 손상시킬 수 있었다. 그는 하지 말라고 권했다. 환자는 화를 냈다. “내가 성형하겠다는데 의사가 왜 말리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곤 휑하니 다른 병원으로 가버렸다.
진 원장은 그런 의사다. 실력이 없어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성형 관련 미국 특허만 4개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깊은 주름을 수술 없이 간단히 치료하는 ‘자가진피회생술’은 세계 3대 미용성형국제학술지(SCI급) 중 하나인 ‘Annals of Plastic Surgery(성형외과학 연보)’에도 실렸다.
이는 학문적·의학적으로 의미가 없으면 실릴 수 없는 학술지에 게재됐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수술을 의미한다. 사실상 세계 최초인 셈이다. 작년 말 성형외과학 연보의 인터넷판에 게재됐고, 올해 6~7월 중에 인쇄본으로 나와 전 세계에 배포될 예정이다.
그가 겸손과 인내심의 화신으로까지 평가받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을 빨리 만나고 싶어 한다. 항상 극과 극은 통한다. 극과 극은 정신세계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밀레 매장 앞에서 엄 대장 모형물과 사진 찍어
드디어 청계산 입구에서 지난 6월 18일 오후 3시 두 사람이 만났다. 마침 그날은 중부지방부터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하지만 엄 대장은 언제나 “내가 산에 가면 산신령이 보살펴 비가 오지 않더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 엄 대장과 여태 경험한 사실은 그랬다. 그렇더라도 언제 비가 올지 몰라 사진만 완성되면 바로 하산하기로 했다
진세훈 원장이 엄홍길 모형물 뒤에서 얼굴만 내밀고 사진을 찍고 있다
“엄 대장같이 훌륭한 사람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엄 대장 같은 사람을 보면 저는 부끄럽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원장님을 뵙게 돼서 제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서로 간단한 덕담을 주고받은 뒤, 진 원장은 사진부터 한 장 찍자고 한다. 마침 밀레 매장 앞에 엄 대장 모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등산객을 위해 사진 찍으라는 배려와 재미 차원에서 만들었다. 진 원장이 엄 대장 신체의 모형물에 얼굴만 내밀고 한 컷 찍었다. 한쪽은 실물 엄 대장, 다른 쪽은 모형 엄 대장이 둘러싸고 있다.
“엄 대장 기사 잘 봤습니다. 네팔 어린이를 위해 학교를 벌써 8개나 짓거나 착공할 계획이더군요.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진세훈 원장과 엄홍길 대장이 녹음이 짙어 가는 청계산을 오르고 있다.
이날 조선일보에 엄 대장이 엄홍길휴먼재단을 통해 네팔에 총 16개의 학교를 짓기로 했으며, 올 연말쯤 8개가 완공되고, 내년쯤 9개째 학교가 착공된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것이 산에서 받은 은혜를 산으로 돌려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있게 한 히말라야와 그 언저리에서 배움에 목말라 하는 어린이를 돕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또 그들이 제대로 교육 받고 사회의 큰 일꾼으로 성장하는 것을 돕는 일이 저의 히말라야 16좌 등정을 도왔던 셰르파들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성형을 권하지 않는 성형외과 의사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몸을 낮춰 동분서주하는 산악인. 두 사람의 공통점이 뭔가 반짝 떠오른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않고 남을 배려하고 자연 그대로 더불어 살아가려는 성향을 지닌 듯하다.
극한 도전, 겸손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듯
엄홍길 대장이 진세훈 원장에게 등산할 때 스틱 잡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마지막 극한 상황에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야만 정상에 올라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극한 상황은 생사를 넘어서는, 불안감이나 공포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단계가 아닌지요?”
“맞습니다. 그 상태가 돼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저도 정상에서 죽을 고비를 한두 번 넘긴 게 아닙니다. 정상에서 제가 한 행위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순간이 한두 번 아닙니다. 그때는 시간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한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실제로는 하루가 흘러간 그런 순간입니다. 아마 그런 상태가 죽음의 공포로부터 초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으면 올라갈 수 없습니다.”
“제가 볼 때는 그 단계가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를 넘나드는, 깨달음의 경지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종교인들도 그런 경험을 엄 대장보다 많이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엄 대장한테 큰 소리 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의학적으로 그 상태는 해마가 뇌 저장기능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실행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데 다운로드가 되지 않은 것과 같은 거지요.
병원에 오는 환자 중에 죽음으로부터 의연한 환자는 여태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스님이나 목사들과 엄 대장이 그런 정신세계나 상태에 대해 대담을 한 번 나누면 의미심장한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요. 대담주제는 영혼의 가치수준으로 정하고 말입니다.”
엄 대장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마 정말 자신이 성직자와 대담을 나눌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그런 사람과 비교해도 되는지를 되짚어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렇게 겸손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다. 다시 진 원장의 말이 이어졌다.
“정말 극한 상황에서의 도전은 인간이 겸손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엄 대장보다 힘세고 기술 좋은 산악인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이 모두 히말라야 정상을 밟았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순수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이, 그리고 운 좋은 사람만이 올라갑니다. 농담 같지만 장수의 요인 중에 가장 큰 변수가 뭔 줄 압니까? 병에 안 걸려야 하고, 소식해야 하고, 술·담배를 하지 않아야 하고 등등 많은 요인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운입니다. 그리고 운은 순수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한테만 다가갑니다.”
“정상에서의 제가 했던 생각과 행위를 돌이켜보면 저도 이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여기 왜 왔지, 뭣 때문에 여기 서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밑에서 보면 전혀 정상적이지 않죠. 정상을 밟았다는 감동이 뒷전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돌이켜볼 때 아찔한 생각이 들죠. 생사를 그렇게 넘나들고도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겁니다.”
“네팔에 학교를 많이 짓는 일도 정신적 능력과 물적 토대, 인적 네트워크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장기려 박사는 국가의료보험을 실시하기 전에 개인 의보를 실시했습니다. 개인이 단돈 1,000원을 내는 의보였는데도 적자를 내지 않았습니다. 조직이 방대한 구조적인 문제보다는 조직을 운영하는 마인드가 포인트입니다. 조직을 투명하게 운영하지 않으면 도둑만 모이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돌아가실 때까지 재산 하나 없었습니다. 모든 재산관리를 온실관리인이 했습니다. 한 푼도 허투루 쓰는 일이 없었으니 새는 돈도 당연히 없었죠. 그러니 개인 의보를 1,000원만 받고도 적자 없이 잘 운영한 겁니다.”
산에 가면 욕심·스트레스 사라져
청계산에 점점 녹음이 우거져 가고 있다. 장마로 억수 같은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던 탓인지 다행히 등산객은 별로 많지 않았다. 주말 엄 대장과 같이 산에 가면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은 경험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지나가는 등산객마다 “어머! 엄 대장님 아니세요? 같이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라며 간청한다. 다행히 이 날은 세 팀 정도 그런 간청을 했다. 짙어가는 녹음 사이로 산딸나무가 하얀 꽃을 피워 날리고 있다. 단연 눈길을 끈다. 두 사람은 산딸나무 꽃을 잡고 향기를 맡아 본다.